제씨쌍충사적

번역:1974년 문화공보부 문화재 관리국 전문위원

 제장군은 처음에는 매우 천했으나 국난(國難)을 만나 한번 분발하여 목사(牧師)의 지위에 까지 뛰어 올라 성곽(成廓)과 병민(兵民)을 전제하여 늠늠히 성세(聲勢)가 있었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전사(戰死)를 했고 전사한지 200여년에 그에 관한 사적(事蹟)이 마침내 숨겨지고 말아서 나라 사람들이 아무도 그것을 깨달은 사람도 없고 아무도 들은 사람도 없어 당초 그런 사람이 있지 않았던 것처럼 되어 버렸으니 이것은 역사 기록에 빠진 대목이 있는 것이 된다.
현재의 상감(上監) 정종대왕(正宗大王) 16年에 하교(下敎)하시기를 "제말(諸沫)은 곽재우(郭再祐)와 동시에 왜적(倭賊)을 토벌(討伐)하다 마침내 순국(殉國)을 했는데 재우(再祐)는 이에 포상 (褒賞)을 받았으나 말(沫)은 아직 포상을 받지 못했다. 그리고 고성(固城)에서의 싸움과성주(星州)에서의 승리는 어찌 이충무공(李忠武公)의 노량(露梁) 싸움보다 크게 뒤지겠는가? 정경(正卿)의 벼슬을 추증(追贈)하고 시호(諡號)를 내려라. 그는 조카 선무공신(宣武功臣)홍록(弘祿)도 한가지로 증직(贈職)을 하고, 싸운 곳에다 비석(碑石)을 세워 그 충렬(忠烈)을 표창하되 그 "제씨 쌍충지지(諸氏雙忠之趾)라고 하라" 하셨다. 이러고난 뒤에라야 나라 사람들이 밝히 깨닫고는 "아! 정말 이 사람이 있었구나!" 라고 했다. 진해(鎭海) 사람들은 말하기를 "이곳이 장군(將軍)의 묘(墓)다" 하고, 성주(星州) 사람들은 말하기를 "저곳이 장군(將軍)이 싸우던 곳이다" 라고 하여, 나뭇꾼과 길쌈하는 여자와 철없이 뛰노는 아이들에 이르기까지 모두 제장군(諸將軍)의 충현(忠賢) 함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당시 초야(草野)에서 의병(義兵)을 일으킨 장수로 왜적(倭賊)들이 두려워하던 사람으로서는 홍의장군 (紅衣將軍) 곽재우(郭再祐) 만한 이가 없었고,  사대부(士大夫) 들이 임진난의 3대전을 꼽을 땐 반드시 이충무공 (李忠武公)의 노량(露梁)싸움을 첫째로 삼는다. 제 장군은 좌우(左右)를 이끌어 잡고 꿋꿋하게 그들과 같은 서열(序列)에 서게 되었으니 이 어찌 우리 거룩하신 상감(上監)의 한마디 말씀으로 중요하게 된 것이 아니겠는가?
이에 빠진 기록과  옛 자취와 초야에 전하는 말과 집안의 기록들이 점차 나타나 역사 기록에 빠진 부분을 보충하여 그에 관한 글을 지을 수가 있게 되었으니 다음과 같다.
제씨는 그 선계가 제갈무후 제갈량 에서 나왔으며,말(沫)은 그의 이름이고, 고성(固城)에 살았으며, 고려벽상공신(高麗壁上功臣) 문유(文儒)가 그 시조 이시고 아버지는 조겸(祖謙)이며,집은 대대로 무(武)를 업(業)으로 삼았으니,이것이 장군의 계보(系譜)와 향관(鄕貫)이다.
가산(家産)을 털어 의병을 모아 왜적과  맞닥뜨려 그 예봉(銳鋒)을 짓씹고 군사를 거느리고 김초유사(金招諭使)의 막하로 소속하여 부서(部署)를 받고 적병을 격멸 하러가 크게 무계(茂溪)를 짓밟아 드디어 성주(星州)를 평정하여 그 공로로 즉시 성주목사(星州牧使)되어,적병을 많이 죽이고 사로잡았으며 포로병들을 탈환하고,성(城)이 함락되자 마침내 전사했으니, 이것이 장군이 일으킨 시말(始末)의 대략이다. 훤칠한 키에 길쑥한 팔을 했으며 아주 호반스럽고 힘이 세었으며,수염이 무성하여 성을 내면 뻣뻣이 위로 치섰고, 그 적에는 마치 우뢰가 기둥을 깨뜨리고 바람이 강물을 진동시키듯,사나운 새가 낚아채듯 하고, 사나운 짐승이 잡아채듯 하여  적병이 감히 대항을 못하고 그를 "날으는 장군(飛將軍)" 이라 했으니, 이것이 장군의 사람됨과 무사의 웅위(雄偉)한 사실이다. 

재상 남구만(南九萬)은  "갑자기 일어나 적을토벌 하여 향하는 곳마다 대적할 자 없었으니 그의 명성은 곽재우와 정기룡 보다 났다."라고 말했고, 판윤 유최기(兪最基)는 "싸울 때마다 용맹한 기상이 발발하고 수염이 신(神)과 같아 왜적(倭賊)들이 바라보기만 하고도 두러워 했다." 라고 말했고, 관찰사(觀察使) 정익하(鄭益河)는 제문을 지어 제사를 지내며 "만고충렬(萬古忠烈)"이라  말했으니, 이것은 모두 분명히 믿을 만한 것이다. 
그러나 반드시 성인(聖人)(임금을 카르킴)이 말씀을 세워 하교(下敎)하시기를 기다리고 난 뒤에야 여러 논평(論評)들이 모두 부착(附着)을 하고 그 견문(見聞)한 바를 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조각지고 불비(不備)한 기록 자료서야 어떻게 족히 장군의 지위를 가볍게 하거나 무겁게 할 수 있겠는가.
 장주(莊周)는 "만세(萬世) 뒤에 알아주는 큰 성인을 한번 만난다는 것은 마침 아침 저녁으로 만나는 것과 같다" 고 했는데, 이에 큰 성인이 아니면  누가 능히 충량(忠良)함을 나타 내어 주고 이룩시켜주며 은미(隱微)하고 감추어진 것을 밝혀 내어 주어, 공적(公的)인 사예(賜豫)가 백세(白世) 뒤에 집중하게 되었는가? 
 역시 장군(將軍)의 성인(聖人)(거룩한 임금,즉 정조대왕을 가리킴) 과의 만남을 축하할 만하다.
 장군(將軍)의 사적은 봉상사(奉常寺)의 시장(諡狀)에 자못 자세하게 실려 있으므로  이제 여기서는 자세히 논하지는 않고, 그 요점 만을 추려서 편저(編著)한 것이다. 홍록(弘祿)의 자(字)는 경행(景行)이고 아버지는 호(灝), 숙부는 말(沫)이다.홍은 사람됨이 단정하고 행실을 잘 닦았다.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섬기기를 삼가히 했다.
 무과에 급제 했으나 나이가 아직 젊었다.  어머니가 연로(年老) 하시다고 해서 벼슬을 구하지 않고 어머니 곁에서 즐겁게 봉양하여 외출(外出)해서 일찍이 밖에서 하룻밤 묵고 돌아오는 법이 없어서 마을에선 효자(孝子)라 일컬었다.
 임진난을 당하자 숙부 말과 함께 토벌 하기로 맹서 하고서 그 아우에게 고하기를 "아아! 한 사람의 몸으로 충(忠)과 효(孝)를 다같이 온전하게 하기는 어렵구나! 다행이 어머님을 모시고 산중에 피난을  간다면 나는 국난에 목숨을 바치겠다" 하고는 드디어 진주싸움에 나아가 왜적의 우두머리를 죽였다.
틈만나면 반드시 혼자 말을 타고 달려가 산중(山中)에서 어머니를 뵈고 돌아오곤 했는데 이렇게 하기를 빈번히 했다.

하루는 돌아오다가 왜적의 큰부대를 만나 조위를 무너뜨리고 싸우다 죽었다. 그 뒤 8일만에 진주성이 역시 함락 되었으니 정유년(丁酉年) 6월 그믐날 이었다. 그 뒤 40여일 지나 왜적이 물러나자 그 아우 홍정(弘禎)이 산중에서 나와 시체를 찾았으나 시체들이 이리저리 서로 포개져 썩고 물어져 있어 어느 것이 형의 시체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문득 칼집을 가로로 하고 활을 잡은채 면목이 마치 살아 있는 사람 같은 시체가 있어 살펴보니 바로 그의 형이었다. 그래서 흠(欽)을 해 돌아와 대둔(大芚)의 척곡산(尺谷山)에 장사 지냈다.
 난(亂)이 끝나자 선무(宣武) 이등공신(二等功臣)에 록훈(錄勳) 되었고 이제 병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아아! 숙질 두 사람이 의병을 일으켜 적을 토벌하여 혹은 한 성벽(城壁)을 취하기도 하고 혹은 이곳 저곳으로 전투를 하며 성(城)을 포위하기도 하며 선후(先後)로 왕사(王事)를 위해 죽으니 가히 충렬(忠烈)하다 아니 할 수 있겠는가?
 옛말에 " 싸움터에서 용기가 없는 것은 효도가 아니다." 했는데, 홍록(弘祿)이 강개(慷慨) 하게 국난에 나간 것은 용기 없는 자가 아닌 데도 차마 그 어머니를 버리지 못해 왕래를 하며 살펴보고 그냥 버려두지 않아 죽을때까지 말지 않았으니 가히 순수한 효성을 가진 사람이라 할 것이다. 세상에 전하기를 제말장군(諸沫將軍)의 정영(精靈)이 특히 보통과는 달라 성주(星州)의 대나무 숲에 강림하여 까만 모자 붉은 도포를 입고 늠늠한 위엄으로 얼굴에는 붉은빛이
있어 눈이 부시게 사람을 쏘아 비췼는데, 얘기가 임란 당시의 일에 미치자, 슬픔과 원망의 한탄을 이윽히 하러니 허리에서 피묻은 칼을 꺼내어 보이며" 웅해(熊海)에서 적의 병영을 쳐부시고 웅진에서 왜적을 깨뜨릴 적에 내가 이 칼로써 했다"고 말하기도 하는가 하면, 그 뒤에 또 칠원현(漆原縣) 관가 뜰에 강림 하기도 했다고 하니 내가 생각하기로는 이상할 것이 없다고 본다. 장군이 일찍이 하잖은 신분 계급에서 일어나 목사(牧師)의 지위에까지 이르렀고, 또 절의(節義)로 죽었으니, 그의 정령이 남보다 능가함은 마땅하게 여겨진다.
죽은지 200여년에 나라 사람들이 그에 관 해서 아무도 깨달은 사람도 없고 아무도 아는 사람도 없어,있었던 사실이 없었던 것처럼 되어버려 또 한 울해 하며 즐겁지 않았었다. 억 이제 상경(上卿)의 벼슬을 주고 높직한 비(碑)를 세워 주었으니 융숭한 보답에도 이젠 유감이 없이 되어 시경(詩經)에 이른바 "신(神)이 이에 마음 아파할 것이 없고 귀신이 돌아갈 곳이 있게 되었다." 는 것과 마찬가지다.  장군의 혼령이 반드시 감격해 하고 칭송하여 산하보다 장하게 되어 길이 우리 나라를 호위하여 비바람을 순조롭게 하여 농사를 병들지 않게 하여 우리 백성으로 하여금 집집마다 부유하고 편안하게 살도록 할것이며, 영남(嶺南)의 인사들이 모두 반드시 아비는 그 아들에게 타이르고 형은 그 아우에게 힘쓰게 하여 한때의 현회(顯晦)로 그 선(善)을 행하는 마음을 게으르게 하지 않아 천백세(千白歲) 뒤에 까지도 그 보답을 받을 것을 알게 될 것이 증서(證書)를 가진 듯이 분명 하리라.

아아! 위대 하도다! 명(銘)에 말한다. 하늘이 장차 큰 병난을 내리려하여, 호걸을 내서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게 하니, 그 인물(人物) 성(城)처럼 우뚝 솟아났도다. 이미 세상에 나와서 혼란을 수습했거든, 어찌하여 보시(報施)에 인색했던가. 보시(報施)에 인색할 리 있으랴, 높은 공열(功烈) 빛났네. 고성 땅에서 분연(奮然)히 몸을 일으켜 그 사업이 이북평(李北平)에 비기리. 진양(晋州)으로 달려가 싸움에 참여했으니, 그 공을 다툴 사람 없네.
 임금 께서 이를 가상히 여기고, 성주목사를 제수 하셨네. 적진을바라보고, 군사를 나누어 공세를 쳐니, 새와 짐승도 두려워서 엎드리는 도다.
 이 때의 의(義)로운 장수는 정기룡(鄭起龍)과 곽재우(郭再祐),공(公)은 오른 편에 있으면서 위세가 적을 압도 하니, 오랑캐 무리가 간담이 서늘하고, 공(公)이 성난 수염 창 끝처럼 뻗혔네. 외로운 성(城)에 대세가 기우니, 공은 여기에서  어찌 했던가. 나라에 몸 바치기로 뜻을 정하고, 있는 힘 다하여 적을 무찔렀네. 
몸은 비록 죽었으나 나라는 살았으니, 장순(張巡),허원(許遠) 이후에 오직 공(公)이 있을뿐 ...

 산 높고 물 맑아  빛나는 그 충절 , 성관에 대나무 푸르러 그 정신 길이 남으리.
 웅해(熊海) 와 정진(鼎津)에서도 큰 승리 거두었건만, 살아서는 훈공(勳功)에 대한 봉작이 없었네. 죽어서도 절의에 순한 포상없어,  이백년 내려오면서 원통한 그 넋이 방황했도다. 명철(明哲)하신 우리 임금께서 은혜로운 륜음(綸音) 내리시니, 저 빛나는 충무공 이순신에게 그 공덕이 비길 만하다 하셨네.
사마(司馬)의 벼슬 추증(追贈) 하시고, 아름다은 시호(諡號) 내리셨네.
또 공의 조카가 국난에 죽은 절의(節義)있어, 저 뫼(山)의 돌을 다듬어 싸움터에 세웠네.  그 위에 무엇이라 새겼나. 
" 두 충신의 옛터 쌍충지지(雙忠之地) " 라 썼네. 이제부터 이후는 바다 동쪽 이 나라에서는 어리석은 백성들도 모두 제씨(諸氏)의 충절(忠節)을 알리. 풍화(風化)와 성교를 백세에 심고, 은전이 구천에까지 미쳤으니, 공이시어! 알음이 있다면 감격의 눈물 흘리리. 뇌질과 질풍같은 기세를 몰아, 요마의 티끌쓸어 버리고 려귀같은 적을 동쪽으로 몰아내어, 우리 백성 살렸도다. 보시(報施)에 인색했던 것은  잠시(暫時)이고, 왜 풍성한 은전(恩典) 끝이 없으리. 모든 착한 사람들 그대의 높은 행실 본받아, 성산(星山)이  다할 때까지, 공의 죽음은 살아있는 것 같으리. 내 말 믿지 못하거든, 이 명(銘)에서 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