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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공명(諸葛孔明)의 영정

칠원제씨의 유래(漆原諸氏의  由來)

 칠원제씨의 원조(元祖)는 周, 時代의 우림장군(羽林將軍)이셨던 갈영(葛嬰)장군이시며, 제갈풍(諸葛豊), 제갈규(諸葛珪)의 차자(次子), 촉한(蜀漢) 승상(丞相) 제갈량(諸葛亮서기181~234)시조님은 자는 공명(孔明)이요 시호는 충무후(忠武候) 호는 와룡(臥龍)이다. 유비가 삼고초려의 예로 제갈공명을 맞이했다 함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며 정치가이며 행정가이며 군인으로서의 탁월한 지도력은 필설로서 다할 수 는 없고 그 애국심과 충성심이 절절한 출사표(出師表)의 함축된 의미는 전무후무한 천하명문으로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귀감과 교훈이 되고있다. 제갈량의 증손이며 제갈경의 아들인 제갈충(諸葛忠)은 촉한이 망하고 부(父)인 제갈경(諸葛京)과 조부(祖父)인 제갈첨(諸葛瞻)과 백부(伯父)인 제갈상(諸葛尙)이 순절하자 13세의 어린나이로 땟목을 타고 동쪽신라에 입국(避魏東來新羅入國)하니 신라 미추왕 5년(서기266년)이었으며 입국선조(入國先祖)님이시다. 입국조(入國祖)제갈충(諸葛忠)선조님은 지리산 아래서 세상을 등지다 싶이 낮에는 밭 갈고 밤에는 책 읽으며(晝耕夜讀)평생을 마쳤다고 하며 자손은 번성하였다. 세월이 흘러 고려현종11년(서기1020년) 경신년(庚申年) 제갈한(諸葛漢)의 두아들 제갈홍(諸葛泓)과 제갈형(諸葛瀅)의 두형제가 출사(出師)를 하자 형인 제갈홍(諸葛泓)은 제(諸)씨 성을 하사받아 남양군(南陽君)에 봉(封)하고 아우인 제갈형(諸葛瀅)은 갈(葛)씨로 성을 하사받아 랑야군(瑯琊君)에 봉(封)하여져 제(諸),갈(葛),제갈(諸葛)씨로 분성(分姓)이 되었다.
 그래서 칠원제씨(漆原諸氏)는 남양군(南陽君)제홍(諸泓)을 분성조(分姓祖)로 하여 고려때 벽상일등공신(壁上一等功臣) 구산부원군(龜山府院君) 제문유(諸文儒)선조님을 중시조(中始祖)로 하여 기세 하고있다.
중시조 제문유(諸文儒) 자는 공화(公和)요, 호는 삼성(三省) 고려 충숙왕 7년(서기 1320년)에 상왕(上王)인 충선왕이 토번(티베트)샤까사원으로 유배(북경에서 티베트 샤까사원까지 4200키로미터)를 갈 때 만리고행(萬里苦行)을 마다 하지 않고 호종(扈從)을 했으며, 끝까지 지극충성(至極忠誠)으로 호종한 신하는 48명중에서 최후로 남은 18명중 한분 이셨다.
거리가 멀고 길이 험난하여 티베트에 도착하는데 일년(一年)여 소요되다보니 중도에서 포기하고 도망을 가버린 신하도 있었으나 제문유 중시조님은 끝까지 호종한 충성지신(忠誠之臣)으로서 서기1323년 원(元)나라 영종 사망후 태정제가 계승하면서 충선왕은 유배에서 풀려나 환국하였다.
 환국(還國)후 중시조(中始祖)님은 그 공로를 인정받아 벽상일등공신(壁上一等功臣)에 책록되고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하시고 자옥대(紫玉帶)와 궤장(几杖)을 하사(下賜)받으시고, 구산부원군(龜山府院君:현재의 칠원(漆原))에 봉해짐으로서 지금의 칠원(漆原)을 본관(本貫)으로 삼았다. 중시조 구산부원군(龜山府院君) 제문유님은 자(子)에 하(廈), 손(孫)에 사강(士崗), 증손(曾孫)에 말충(末忠)을 두었으나 실묘(失墓)하였다. 5세손 제철손(諸哲孫)선조님은 조선 성종조에 성균관사예(成均館司藝)를 지내셨는데 성품(性品)이 강직(剛直)하고 불의(不義)에 타협하지 않아 연산군 무오사화(戊午士禍)시에 지조를 지켜 관직(官職)을 버리고 경남 고성(固城)에 낙향(落鄕)하여,입고성(入固城)선조님이 되시었으며, 칠원제씨(漆原諸氏)는 구산부원군(龜山府原君) 제문유(諸文儒)중시조(中始祖)님과, 동고(東皐)제철손(諸哲孫)선조님의 후손들이다.

동고(東皐)제철손(諸哲孫)선조님은 장자(長子)에 조겸(祖謙), 차자(次子)에 복겸(福謙), 삼자(三子)에 익겸(益謙), 사자(四子)에 수겸(受謙)을 두셨다. 장자(長子)절충장군(折衝將軍)제조겸(諸祖謙)선조님은 제호(諸灝), 제탁(諸濯), 제숙(諸淑), 제락(諸洛), 제말(諸沫) 다섯분의 아들을 두셨고, 차자(次子)복겸(福謙)선조님은 자(子)에 형(泂)한분을 두셨으며, 삼자(三子)익겸(益謙)선조님은 장자(長子)에 환(渙), 손자(孫子)에 사완(士完)을 두셨고, 차자(次子)에 순(淳)을 손자(孫子)에 홍희(弘禧:자 경완(景完),호(號),만성당(晩惺堂):만성공파(晩惺公派)
을 두셨다. 조선 선조 25년 임진년(서기1592년)평화롭던 이땅에 외적이 침락하여 살생,방화,약탈등 온갖만행을 자행하여 이 강토를 초토화 시겼다.
조정(朝廷)은 동인(東人),서인(西人)으로 파당이 나뉘어 당파분쟁이 치열하여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것이라는 동인의 말만 믿고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던 터라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었다. 
왜적 15만 대군이 남해안에 상륙하여 온갖 만행을 자행하자 영남의 고을군(郡), 현(縣)수령들은 도망을 간자들이 많고 관군들도 흩어져 무정부 상태가 되어 더 이상 대처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전국의 뜻있는 의병(義兵)들이 누란의 위기에 처한 나라와 백성들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하여 들불처럼일어났다. 
우리의 위대한 제락(諸洛)선조님 께서도 동생이신 충의공 제말(忠毅公 諸沫)과 조카인 판서공 제홍록(判書公 諸泓祿)과 같이 의병을 일으켜 고성배둔 전투와 당황포해전 구만담치 전쟁에서 왜장을 쳐죽이고 승전하여 그 공로로 순릉참봉(順陵參奉)이 되고 한성부서윤(漢城府庶尹)에 추증(追贈)이 되셨다
충의공제말(忠毅公諸沫:1543년~1593)자(字)는 성여(成汝),호(號)는 가계(柯溪)장군은 조카 판서공 제홍록(判書公 諸弘:1558~1597)자(字)는 경행(景行),호(號)는 고봉(高峯),장군과 같이 가재(家財)를 내어 무기를 만들고 의병을 일으켜 고성, 의령, 웅해(熊海), 김해(金海), 무계(茂溪), 정진(鼎津), 고령(高嶺), 현풍, 성주(星州)까지 진격하여 성주대첩(星州大捷)으로 성주를 평정하였다. 그 공로로 서기1593년 1월 문충공(文忠功)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초유사(招諭使)께서 조정에 장군을 포상(褒賞)해 달라는 장계(狀啓)를 올려 선조대왕의 명(命)으로 특별히 성주목사(星州牧使)를 제수(除授)받아 성주목사(星州牧使)를 역임 하셨으며, 8척(八尺)의 큰 키에 팔이 길고 수염이 3척(三尺)이며, 8척(八尺)의 장검으로 왜적을 무찔렀으며 성이나면 삼척(三尺)이나 되는 수염이 위로 치솟아 올라가 감히 적들이 쳐다보지도 못했다고 하며, 장군이 싸울적에는 마치 우레가 기둥을 깨뜨리고 바람이 강물을 진동시키듯 사나운 새(鳥)가 낚아채듯 사나운 맹수(猛獸)가 잡아채듯 하여 적들이 감히 대항을 못하고 도망을가 장군을 날르는 장군 비장군(飛將軍)이라고 불렀다고 하며, 경북 성주군 성주읍 경산리 295-1번지 소재 쌍충사적비(雙忠事蹟碑:경북 지방유형문화재61호), 경남 진주시 본성동 진주성지내 촉석공원에 소재한 쌍충사적비(雙忠事蹟碑:경남 지방유형문화재 탑비3호)와 학봉 김성일(鶴峯 金誠一) 초유사 장문(招諭使 狀聞), 약천 남구만 영남잡지(藥泉 南九萬 嶺南雜誌)에 상세히 기록 되어있다.
서기 1593년 계사년(癸巳年) 4월 적의대부대에 의해 성주성(星州城)은 포위를 당하고 1,000명도 되지않는 적은 병사로 수만명의 왜적과 밤낮으로 교전(交戰)을 벌려 무수한 적을 죽였으나 식량과 화살이 떨어지고, 힘도 소진이 되고 밖에서는 구원병(救援兵)도 오지않아 더 이상 버틸수가 없음을 알고 한명의 적이라도 더무찌르기 위해 필마단기(匹馬單騎)로 창을 잡고 저돌적으로 적진으로 뛰어들어 닥치는대로 적을 섬멸하다가 적의 포탄에 맞아 말에서 떨어져 숨이 끊어질때까지 적을 꾸짖는소리가 입에서 끊이지 않았고, 손에쥔 긴창을 놓지 않았다고 한다. 

「하늘이 만약 나에게 몇 년만 더 생명(生命)을 빌려 주었드라면 왜적이 한명도 바다를 건너 돌아가지 못하게 하였을 것이다」 라는 장군의 말씀은 “아! 만고충렬(萬古忠烈)이라 아니할 수 없다.”
한자루의 칼에 필마를 타고서 적은 군사로 많은 적을 상대하였고 약한 것으로 강한상대를 제압하여 적을섬멸 하니 정기룡과 곽재우 보다도 그 공적이 크다고 약천 남구만의 영남잡지와 문충공 학봉 김성일 초유사 문집에도 기록되어있지만 장군의 후손들이 미약(微弱)하여, 공적(功蹟)과 명성(名聲)이 인멸되어 역사에 누락되어 통탄한 마음 금할 수 없다.
충의공 제말장군은 조카 제홍록 장군과 같이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여 성주목사(星州牧使)를 역임하셨고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추증(追贈)되고, 충장공(忠將公) 시호(諡號)를 받으셨고 순조12년 가경17년(嘉慶17年)서기 1812년에충의공(忠毅公) 재시호(再諡號)를 받으셨다.
판서공 제홍록(判書公 諸弘祿)장군님도 숙부(叔父)제말장군과 같이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였으나, 연로(年老)하신 어머니를 봉양(奉養)하기 위해 벼슬을구하지 않고 낙향중 임진난이 발발하자 숙부 충의공 제말장군과 함께 왜적을토벌하기로 맹서(盟誓)하고 그 아우 홍정(弘禎)에게 한사람의 몸으로 충(忠)과 효(孝)를 겸하기는 어렵구나 하고 아우 홍정에게 어머니 봉양을 부탁하고 숙부말(沫)과 같이 정진(鼎津)과 무계(茂溪)전투와 성주대첩(星州大捷)에서 큰 공을 세웠다. 서기 1593년 계사년(癸巳年) 4월 성주성이 함락되고 성주목사 제말장군이 전사를 하자 제홍록장군은 진주성(晋州城)으로 와서 큰 공을 세우고 이충무공(李忠武公)의 대해전(大海戰)에 정보제공 등 많은공적을 세웠다고 난중일기에도 기록되어 있으며, 정유재란(서기1597년)때 까지 의병 활동을 계속하다 1597년 6월 22일 단기로 적의 대부대(大部隊)와 싸우다 전사 하셨다. 그후 8일 만에 진주성이 함락 되었다. 난(亂)이 끝나고 선무이등공신(宣武二等功臣)에 록훈(錄勳)되었고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추증(追贈)되었으며, 서기1812년(순조12년)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재추증(再追贈) 되셨다.

이상(以上) 세(三)분 선조님들 외에도 많은 구국충신(救國忠臣) 선조(先祖)님 들이 계셨지만 대표적으로 고성, 사천, 남해, 곤양, 김해, 창녕, 양산, 진해, 진주, 정암(鼎岩)등 으로 침략해오는 왜적들을 구국일념(救國一念)으로 무찌르신
일등공신(一等功臣)첨정기당 제억보(僉正杞唐 諸億輔)
이등공신(二等功臣)금군약당 제응립(禁軍藥塘 諸應立)
이등공신(二等功臣)원정중당 제득호(原正重唐 諸得浩)절충장군 통정대부 증직
이등공신(二等功臣)사복약강 제득인(司僕約江 諸得仁)
이등공신(二等功臣)부장시헌 제여물(部將始軒 諸餘勿)加資忠毅校尉贈職
이등공신(二等功臣)우림위백강 제순복(羽林衛百岡 諸順福)
이등공신(二等功臣)수문장치강 제순수(守門將治岡 諸順壽)部將追贈
삼등공신(三等功臣)보인우정 제세봉(保人羽亭 諸世鳳)
이등공신(二等功臣)첨정수헌 제억춘(僉正首軒 諸億春)훈련원정 통훈대부 추증
삼등공신(三等功臣)사복화강 제수영(司僕華岡 諸秀英)
삼등공신(三等功臣)수문장대정 제만호(守門將大貞 諸晩浩)부장추증
             영부군관해천 제만춘(永付軍官海川 諸萬春)거제도대전에서 
             대승을 거두는데 큰 공을 세움(이충무공 난중일기 중에서 발췌)
삼등공신(三等功臣)수문장덕재 제영인(守門將德齊 諸令仁)부장추증
삼등공신(三等功臣)주부귀강 제광금(主簿貴岡 諸廣金)훈련원 판관 추증
벽방망장거성 제한국(璧芳望將巨星 諸漢國)제2당황포 해전에서 정보제공등 승  리공신(이충무공 난중일기 중에서 발췌)
삼등공신(三等功臣)수문장덕재 제영인(守門將德齊 諸令仁)부장추증
삼등공신(三等功臣)주부귀강 제광금(主簿貴岡 諸廣金)훈련원 판관 추증
벽방망장거성 제한국(璧芳望將巨星 諸漢國)제2당황포 해전에서 정보제공등 승  리공신(이충무공 난중일기 중에서 발췌)
일등공신(一等功臣) 부정(副正) 제광해(諸光海)   임난공신 록권 7항9열 
이등공신(二等功臣) 부장(部將) 제인국(諸仁國)   임난공신 록권 72항11열
이등공신(二等功臣) 금군(禁軍) 제 억(諸 億)     임난공신 록권 73항1열
이등공신(二等功臣) 수문장(守門將) 제 진(諸 進) 임난공신 록권 80항11열
이등공신(二等功臣) 부장(部將) 갈인복(葛仁福)   임난공신 록권 52항6열
이등공신(二等功臣) 사복(司僕) 갈사택(葛四澤)   임난공신 록권 55항5열
이등공신(二等功臣) 금군(禁軍) 제갈성룡(諸葛成龍) 임난공신 록권 62항5열
                             제갈봉하(諸葛逢夏) 유격장군 명국처사


이상 선조님들께서 일가친척(一家親戚)등 종중원들을 조직하여 종친부대(宗親部隊)를 결성하고 또한 의병부대(義兵部隊)를 결성하여 경상병사 최경회(慶尙兵使 崔慶會), 창의사 김천일(倡義使 金千鎰), 김시민 목사(金時敏 牧使)등과도 연합하여 적을 무찌르고 혹은 단독작전으로 적을 섬멸했으며 충무공 이순신 장군(忠武公 李舜臣 將軍)과도 연합하여 왜적을 무찔렀으며, 특히 거제도 대전과, 제2당황포 대전에서의 대승(大勝)도 제만춘, 제한국의 공적(功蹟)이 컸다고 난중일기에도 기록되어 있다.
종친부대(宗親部隊)까지 결성하여 자신들의 일신을 돌보지 않고 오직 구국충정(救國忠情)의 일념으로 나라위해 목숨바쳐 싸우신 선조(先祖)님들의 충효(忠孝)정신을 우리들은 가슴깊이 새겨 잊지 말아야 할것이다.
지금껏 칠원제씨(漆原諸氏)의 유래(由來) 및 계보(系譜)와 특히 임진난(壬辰亂) 당시 선조(先祖)님들의 활약상을 일부분 이라도 표현(表現)할 수 있게되어 다행으로 생각하며 구국충신(救國忠臣)의 후손(後孫)으로서 선조님들의 충효(忠孝)정신을 이어받아 나라발전과 사회번영에 이바지하고 찬란한 미래를 열어가며 번성(繁盛)하리라. 
○ 제갈씨의 기원
제갈씨는 본래 갈(葛)씨의 단성이었으나, 랑야의 제현(諸縣산동성 제성경 부근)에 살고 있던 일족이었는데, 후에 동방의 양도(陽都,산동성 하주부근)으로 이주(移住)하였는데 양도(陽都)에는 원래부터 갈(葛)씨 성의 씨족(氏族)이 살고 있어으므로 사람들은 이들과 구별하기 위하여 새로 이사온 갈(葛)씨를 제(諸)현에서 온 갈(葛)씨라는 뜻으로 제갈(諸葛)이라고 부르게 되어 제갈(諸葛)씨가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제(諸), 제갈(諸葛), 갈(葛)씨는 같은 씨족(氏族)이다.

본관지 연혁:지금은 경남 함안군 칠원(漆原)이다. 신라초의 칠토현(漆吐縣)을 경덕왕이 칠제(漆隄)로 고쳐 의안군(義安郡:창원)의 영현(領縣)을 삼았다. 고려때 칠원으로 바뀌고 현종9년 김주(金州)에 예속되었다가 조선선조25년 다시 창원에 예속시켰는데 고종32년 군(郡)으로 승격시켰다가 뒤에 군(郡)을 폐하고 함안군(咸安郡)에 병합 시켰다.

제말(諸沫) 장군은 의병을 모아 고령, 현풍을 거쳐 경북 성주에 이르기까지 왜적의 예봉을 꺽고 봉쇄하였으며, 성주대첩의 공로로 당시 선조대왕으로부터 정주목사로 제수받아 성주목사로 계시면서 많은 전공을 세웠습니다.
기골이 장대하고 날아 다니는 것처럼, 민첩하여 비장군이란 별칭까지 얻어, 비장군이란 말만 들어도 왜적들이 감히 대적을 못하고 혼비백산 도망을 쳤다고 비문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충의공 제말 장군의 조카되시는 제홍록 장군은 주로 진주성 일대에서 전투를 하였으며 국난을 당하여 나라와 백성들의 생명을 지키신 장군의 공적은 난중일기에도 기록되여 있습니다. 
첨부한 자료를 보시기 바랍니다. 
"제씨 쌍충 사적비" 비문에 기록되어 있듯이 당시 의병장이신 곽재우, 정기룡장군 이상가는 공적을 세웠는데도 역사에 누락되어 안타까운 마음 금 할길 없어, 후손들과 모든 사람들이 알아야 하겠기에 미력하나마 이 장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앞으로도 더 관심 있고 유능한 분들이 자료를 찾고 연구하여, 잊혔던 사적은 찾아내고 묻혔던 사적은 발굴하여 나라와 백성을 위하여 목숨 바친 두 장군의 공적을 제대로 세상에 알려주시기 바라면서 이 글을 마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