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기록

『정조실록』16년 임자(1792. 건릉 57) 9월 20일
 경상도 관찰사 정대용이 장계로 아뢰기를, 고 성주 목사 제말 및 그 조카인 선무공신 제홍록에 대해 유적이나 묘소가 있는 곳과 후손이있는지의 여부를 각 해읍(該邑)에 지위 하였습니다. 성주에서는 "관풍안 가운데 목사 제말이라고 기록된 이름 아래「적(賊)을 토벌한 공로가 있어서 주부(主簿)에서 승차(陞差)되었다가 얼마 안 되어 파직되어 갔다.」라는 내용의 13자의 주(註)가 있을 뿐이며  순절할 때의 사적에 대해서는 별달리 근거할 것이 없다.

 이름자는"말(沫)" 자와 "말(末)"자가 간간이 섞여서 나오는데 제홍록의 아버지의 이름을 호(湖)로 기록하였다. 형제 사이에는 반드시 항렬(行列)을 따라 이름을 지었을 것인데 "호(湖)"와 "말(末)"이 모두 물수변(水)에 있는 글자이니 제목사의 이름이 반드시 말(沫) 자일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진해에서는 제말의 묘소가 본현 동면 하귀산에 있는데 칠원의 김동해와 김동수 등이 외손으로서 수호 하고 있다. 고 하였으며. 고성에서는 " 제홍록의 묘소가 본현 대둔면 척곡산에 있는데 본현의 제경빈과 제국추 등이 방손으로서 수호하고 있다." 고 하였습니다. 제말과 제홍록의 직손을 두루 찾아보았으나 지금 현존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제말은 성주에서 순절 하였고, 제홍록은 진양에서 순절 하였는데 모두 고성에서 포위당했을 때여서 그들이 몸을 죽여 인(仁)을 이룬 곳이 성 아래인 듯하나 오래된 일이므로 증명할 만한 문서가 없습니다. 하니 회유하기를."지명이 각각 다르지만 둘 다 지조를 지킨 것은 마찬가지이니 성주와 진주 두 곳에 각각 비석을 하나씩 세우되, 병조판서 이병모가 일찍이 그곳의 도백을 지낸 바 있고 또 글씨를 잘 쓰니 이병모로 하여금 비문을 써 올리게 하라." 하였다.

 1792년 9월 29일
 판서 제말(諸沫)에게는 충의(忠毅), 증 판서 공서린(孔瑞麟)에게는 문헌, 판서 이익정(李益炡) 에게는 정간판서 황경원(黃景源) 에게는 문정  판서 조영국 에게는 정현,  증 찬성 김준룡에게는 충양의 시호를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