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충록과 성야대첩

쌍충록과 성야대첩(雙忠錄과 星野大捷)   

                 국립중앙도서관(國立中央圖書館)
                                   장 순 범 (張 順 範)

 『충의(忠義)는 영멸(永滅)하지 않는다.』고 한 옛사람의 말이 지금 이 제씨(諸氏)의 쌍충(雙忠)을 위해 이른 것 같다. 
일문쌍충(一門雙忠)으로 유명한 충장공 제말(忠壯公 諸沫)과 그의 조카 제홍록(諸弘祿)은 임진왜란(壬辰倭亂)때 고성(固城)에서 거의(擧義)하여 많은 왜적을 무찔러 전공을 세우고 순절(殉節)하였으나 그후 그의 충절은 백여년 동안 고양(顧揚)하지 못했으니 이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그러자 그들이 순절한지 150년이 지난 1737(영조13)년 정석유의 신우설과 도상욱의 자료수집에 의하여 그들의 위업(偉業)과 탁행(卓行)이 드러났다. 이런일이 바로 「적덕필제(積德必題)」의 명언(明言)을 증명한 것이라 하겠다. 이보다 앞서 도상욱(都尙郁)은 정석유의 신우설을 읍지(邑誌)에 등재하여 후세에 전하려 하였으나 당시 그 고을 수제(守帝)의 저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다만 그의 충절이 매몰(埋沒)됨을 개탄하며 각처에 산재한 그의 전공자료를 수집하여 『쌍충록』이란 한 책자를 만들었다. 그러자 마침 조정에서는 제말장군의 사적을 알아 들이라는 명령을 내렸고, 도상욱이 편집한 쌍충록이 유일한 자료로 조정에 등장하게 되었다. 이를본 왕은 친히 제문을 내리고 증의 증시 그리고 충렬사 배향(配享)을 받도록 하여 그의 충혼을 위로 했다. 자고로 훌륭한 업적을 남기고도 당시 문헌의 부족으로 인하여 현요 못하는 예가 있으나 실적이 있으면 언젠가는 반드시 밝혀지는 법이다. 만약 도상욱이 자료를 수집하지 아니 하였다면 조정에서 어떻게 그 사정을 알았을 것이며 읍지등재의 저지를 받는 충격이 없었다면 도상욱이 이 자료를 수집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어찌 충의를 존중하는 시대와 고사를 탐구하는 독지가를 기다려 이루어진 것이 아니겠는가.
이제 이 쌍충록을 보면서 우선 그들이 충의를 되살려 보는데 그 의미가 있고 또한 당시 전황을 볼수 있다는 점에서 보다 가치가 있는 자료라 생각된다.

초야(草野)의 두 무인(武人)

남해안의 크고 작은 섬마을을 이웃하고 출렁이는 대양의 파도소리와 함께 아늑한 운치를 자랑하는 고성(固城) 고을에 숙질간의 두 무인이 탄생하였으니, 그는 바로 제말(諸沫)(1543 중종38)과 제홍록(諸弘祿)(1558명종13)이다.
이들이 태어날 무렵 서양에서는 포루투칼과 스페인의 함선을 띄우고 식민지와 무역지를 구하여 인도,중국,필리핀을 거쳐, 일본(日本)에까지 정박하고 일본인에게 조총을 전하는 등 통상 무역이 시작될 때였다.
당시 명(明)나라는 전성기를 고비로 외구가 절동에 침입함으로 인해 국력이 점점 기울어져 갈 때이며, 우리나라에는 별다른 외침(外侵)은 없었으나 위정자들의 정치문란과 세력 다툼으로 사화(士禍)와 파쟁(派爭)이 일어나 동족상잔(同族相殘)의 참극이 지난 뒤였다. 그리고 유교존숭(儒敎尊崇)에 유래(由來)한 문치사상(文治思想)과 전쟁이 없는 수백년 동안의 평화로 말미암아 고식적인 평화에 만족, 문(文)만을 숭상하고 무(武)를 천시하는 시대조류가 깊이 뿌리 박고 있었을 때였다.
이들은 모두 무반문호(武班門戶)의 후예로 늠름하고 씩씩한 무장의 기골을 갖추었다.
제말은 8척의 장신으로 절인지력(絶人之力)이 있어 일찌기 무과에 합격하고 부장,수문장등 관직에 입명 되었으나 나아가지 아니 하였으며, 제홍록 역시 무장의 기품으로 스물넷 살에 무과에 급제했다.
그러나 편모의 시측(侍側)을 위하여 관계(官界)에 진출하지 아니하였다. 이 두 무인은 이렇게 훌륭한 포부를 지니고도 출세를 꾀하지 아니하고 오직 향리(鄕里)에 숨어 양성수신(養性修身)에 만족했었다.  그리고 그들은 제갈공명의 후예라 하여 항상 공명이 지은 "출사표"를 읽었으며 이를 본받아 관로의 공명(功名)을 탐하지 아니하였다고 한다. 

비장군(飛將軍)의 성야대전(星野大戰)

임진(1592)년 4월 15일이었다. 15만 대군의 왜적이 부산에 상륙했다. 당시 우리나라는 고금(古今)에 없던 대군의 침략을 받은 것이다. 이는 오로지 일본(日本)에서 청(請)해 온 동맹(同盟)에 불응했기 때문이다.
이때 일본(日本)에는 풍신수길(豊臣秀吉)이란 영웅이 나와 혼란기를 수습하고 대륙의 침략을 꿈꾸고 있었다.
이리하여 대륙을 침략하는데 발판을 삼으려는 목적으로 여러 차례에 걸쳐 우리나라와의 동맹을 교섭해 왔다.
그러나 여기에는 당시 우리나라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정명가도(征明假道)의 문제가 있었다. 이러한 교섭이 결렬되자 풍신수길(豊臣秀吉)은 곧 원정군(遠征軍)을 편성하여 우리나라를 침범케 했던 것이다.
이보다 앞서 우리나라에 서도 비변사(備邊司)의 보고(報告)와 빈번한 일본 사신(日本 使臣)들의 정보로 인하여 사태를 짐작하고 대책을 강구하여  김취.이광.윤선각등으로 무기를 정비도록 하고 아울러 성지를 수축케 했으며, 이일과 신립등으로 하여금 변비(邊備)를 순시케하여 요충지(要衝地)인 영남지방(嶺南地方)에 많은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갑자기 밀어닥치는 대군(大軍)을 막아낼 수 없었다. 이리하여 이일(李鎰)은 상주에서 대패하고, 신립은 충주 배수진에서 패전 하였으니 이곳은 우리나라의 가장 요새이며 중심부이다. 또한 남해안에서는 원균(元均)의 패전으로 많은 왜적이 상륙하게 되었으며, 아군측의 막대한 손실을 가져왔다. 소서행장(小西行將)을 선봉으로 하는 왜적은 뒤따라온 가등청정(加藤淸正).흑전장정(黑田長政).도진의홍(島津義弘) 등과 합세(合勢)하여 북상(北上)했다.
5월에 서울을 함락하여 이를 근거지로 삼고 6월에는 평양. 의주를 거처 회령까지 삼천리 강토를 무난히 석권(席捲) 했었다. 그러나 한편 해상(海上)에서는 전라좌수사 이순신의 등장으로 일본의 수군을 대파했다. 1차는 옥포(玉浦)에서, 2차는 사천(泗川).당진(唐津)등에서, 3차는 한산도(閑山島)에서, 4차는 부산해전(釜山海戰)에서 적선(賊船)을 모조리 격파하여 완전히 제해권(制海權)을 장악하였다. 그리고 국내 각처에서는 왜병의 침략행위에 대한 민족적 반항으로 의병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조충(趙忠)은 충청도 옥천(忠淸道 沃川)에서 일어나 청주(淸州)에 왜적을 치고 금산(錦山)에 왜병(倭兵)과 싸우다가 전사했고, 곽재우는 경상도(慶尙道) 의령(宜寧)에서 기병(起兵)하여 창녕(昌寧)등지의 적을 물리치고 진주(晋州)에 김시민(金時敏)과 합세하여 대승(大勝)을 거두었다. 고경명(高敬命)은 전라도(全羅道)에서 김천일(金天鎰)은 호남(湖南)에서, 정문부(鄭文孚)는 함경도(咸鏡道)에서, 그리고 서산대사(西山大師)와 사명당(泗溟堂)은 팔도(八道)승려를 이끌고 왜적과 싸웠다. 이때 제말(諸沫)은 50이 가까운 나
이였고 그의 조카 홍록(弘祿) 30좌우의 장년이었다.

가산(家産)을 털어 한 부대의 의군(義軍)을 모집 하고 자신이 선봉이 되어 남해안지방에 산재(散在)하고 있는 왜적을 모조리 격파했다. 이때 왜적들은 제말장군에게 나는 비장군(飛將軍)이라 별명이 붙기도 했다.
이렇게 좌충우돌하면서 근방의 왜적을 소탕하고 그해 7월에 초유사(招諭使)로서진주(晋州)에 머물고 있는 김성일(金誠一)을 찾아가 자신이 행하는 구국흭책(救國劃策)을 건의하였다. 이 때 김성일은 그의 무장다운 기상과 충성심을 보고 조정에 천거하여 장임(將任)에 기용(起用)하도록 했다. 이리하여 그는 제도의 의병을 분담하여 지휘하게 되었다. 그리고 성주와 고령 등지의 왜적을 맡아 치게 되었다. 성주는 원래 적(賊)의 소굴이 된지 오래이므로 함부로 대적할 수 없었다. 성주성 근처인 안원(安院)과 무계(茂溪) 사이에 진(陳)을 치고, 산상(山上)에 많은 기(旗)를 만들어 세웠으니 이는 아군(我軍)이 많다는 것을 알게 하여 적병으로 하여금 겁에 질리도록 한 것이다.
이렇게 전술을 쓰며 접전할 때마다 대승을 거두었다. 그의 무기를 다루는 솜씨는 누구도 따를 수 없었다. 이 때 왜적들은 『비장군』이란 신호만 떨어지면 무조건 대항을 포기하고 도망쳤다. 적의 소굴이던 성주와 고령 등지도 이렇게 무난히 수복했다. 이 공로로 성주목사(星州牧使)로 부임하게 되었으니 계사(癸巳)(1593)년 정월(正月)이었다. 그는 성주목사로 부임하면서 사수(死守)하기를 작정했다.
이때 적을 무찌른 공로는 누구도 앞설 수 없었다. 그러자 김성일은 진주에서 병사(病死)하고 김면(金沔)은 지례(知禮)에서 죽었다. 모든 의병들은 통서(統緖)를 잃음과 동시에 전의(戰意)조차 잃고 말았다. 이를 틈타 왜적은 다시 대공세를 가해왔다. 그러나 제말(諸沫)은 주야로 대전을 계속했다. 결사적인 전투였다.
성주성은 완전히 적의 포위망에 들었고 원병(援兵)도 없는 고군단기였다.
마상장창 으로 무수한 왜병을 사살했으나 겹겹이 쌓인 왜적의 적탄을 어떻게 막으랴,
부사로 부임한지 몇 달 안되는 4월 그믐날 그는 적탄에 의(依)해 전사하고 말았다.
그의 조카 홍록(弘祿)은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 슬하에서 무술을 연마했다.
숙부 말(沫)을 따라 웅천, 김해, 정남 등지에 있는 왜적을 소탕하여 대첩의 명성을 떨쳤다.
이 공로로 훈련부정(訓鍊副正)에 특전되고 숙부 말(沫)이 전사하자  이순신(李舜臣)의 막하(幕下)가 되어 더욱 많은 전과를 올렸다. 이순신이 일본의 수군을 대파한 것도 그의 획책이 컸다고 한다.
정유(1597)년 재란때 이순신이 피포(被逋)되고 원균이 대신 군사를 통솔하게 되자 홍록은 통곡하며 말하기를 수적(讐賊)을 토평(討平)하지 못한채 원수(元帥)는 파직되었으니 국사(國事)가  어떻게 될것인가  하며, 적의 포위 속에 있는 진주성(晋州城)에 들어가 성수(城守)를 도와 싸웠다.  하루는 대둔산(大屯山)에 피난중인 어머니가 보고 싶어 대둔산 으로 말을 달렸다. 그 사이 성중(城中)에는 대적(大賊)이 침입하여 온 성중(中)은 어육(魚肉)이 되었다. 이에 그는 단신으로 충돌하면서도 많은 왜적을 살상했다. 그러나 끝내 쏱아지는 적탄을 피하지 못하고 전사하였으니 때는 정유(丁酉)년 6월 22일이 었다. 죽림(竹林)속에 신화(정석유.기우설) 성주 문관 정석유는 자기가 겪은 신우설(神遇設)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제말장군이 성주성 싸움에서 순절한지 150년이 지난 정사(丁巳)(1737)년 정(正)월 17일 밤이었다. 나는 당시 성주목사 홍응몽(洪應夢)의 아우 응창과 별시에 응시하기 위해 매죽당(梅竹堂)에서 시강을 하고 있었다.
밤은 깊어 오경(五更)에 가까웠다. 응진은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안두(案頭)에 엎드려 코를 골며 깊은 잠이 들고 있었다. 밖에는 달이 휘엉청 밝았다. 나는 밖으로 나와 지이헌에 올라거닐며 설월의 아름다운 야경을 옮조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달빛이 희미한 죽음(竹陰) 속으로부터 우수수 하는 바람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갑자기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서쪽 담장 기슭으로부터 봉모강포(鳳帽絳袍)차림의 관인(官人)이 나타났다. 
그는 나에게 다가와 말하기를 「내가 자네를 보고자한지 오래노라」고 하였다. 나는 정신을 가다듬어 생각해 보았다. 이렇게 깊은 밤중에 사람이 나타날 이치가 없었다. 반드시 신(神)임 을 알고 정중하게 읍(揖)을 하며 물었다. 
「대관(大官)은 어느곳에 거처하시는 분이시며 또한 성명은 누구입니까」하니 「나는 동서남북에 정처가 없소. 그리고 성명은 본부(本府)의 관안(官案)을 상고해 보시면 알 것이며 관칭 제목사(官稱 諸牧使) 라고 하오」했다. 나는 또 물었다. 「나를 보고자 하는 이유는 무었입니까」했더니,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임진왜란때 의거하여 많은 왜적을 무찔러 그 공로로 성주목사에 특제되었었다. 이리하여 성주성을 사수하며 왜적과 싸우다가 끝내 전사하고 말았다. 그러나 당시 문헌의 민몰로 인하여 국사에 전해지지 못하고 후인들은 장부다웠던 나를 알지 못하니 이 얼마나 원통한 일인가. 백여년이 지난 오늘까지 원한을 풀지 못하여 달이 밝거나 흐린날 밤이면 언제나 이렇게 출몰 하였노라. 그러나 누구도 나로 더불어 말해 주는 사람이 없었노라. 내가 그대를 보려는 것은 오직 이런 일을 호소하려는 것이다. 당시 분의의 공로로 말한다면 누구도 나에게 능가할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정기룡 같은 사람은 훈명을 세우고 통제의 지위에 까지 이르렸다. 이 또한 천명일까? 대장부가 적노를 섬멸하여 인각에 오르지 못하며 청사(靑史)에 이름을 전하지 못하니 비록 천백년이 지난들 어찌 이 원한이 풀리랴」하며 한숨을 내쉬고 허리에 차고 있던 칼을 뽑아 보이는데 왜적을 베였던 성혈이 달빛에 영롱하게 번쩍이고 있었다. 순간 울결한 기운을 이기지 못하는 듯이 얼굴에 홍광(紅光)을 띄우며 긴 수염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시를 옮으며 나더러 들어 달라고 했는데 시(詩)는 다음과 같다.

산은 긴 구름과 같이 돌아가고
하늘에 도는 달은 같이 외롭구나.
적막한 성산관에 
혼령은 있는가 없는가
山長雲共去 天逈月同孤
(산장운공거 천회월동고)
寂寞星山館 幽魂有也無
(적막성산관 유혼유야무)

나는 그 시(詩)의 고매함을 찬양하고 그 의사를 물었다. 그는 대답 하기를,「알았으면 되었노라. 원하건대 잊지 말아 주오」하며 그는 홀연히 보이지 않았다. 나는 너무도 기이한 일이라, 그 이튿날 본부에 비치된 관안을 참고 했다. 과연 제말이 계사년 정월에 도임하여 그해 4월에 전사 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그후 정익하가 영남관찰사가 되었을 때 이 신우설(神遇設)을 듣고 장군에 대한 사적을 탐지했다.
분묘는 진해 동면 하구지에 있는데 그 후손들의 부진으로 인하여 황총(荒塚)이 되고 말았다. 정익하는 이를 통탄하며 분묘(墳墓)를 수축하고 조정에 보문하려 했으나 마침 정익하는 파직될 무렵이었다.
이때 정익하는 진해현 어사적에게 명령하여 분묘를 수축하고 수호하도록 했는데, 이보다 앞서 어사적은 이 일을 통고 받기 전에 이런 일이 있었다. 하루는 낮잠이 흔곤히 들었었는데 꿈에 관복을 입은 위인(偉人)이 나타나 말 하기를 『본도 감사는 내 분묘를 수축하고 또한 수호 하려고 주선하고 있거늘 그대는 읍재(邑宰)로써 어찌 일을 모르고 있느냐.』하는 말을 듣고 잠을 깨었을 때 이미 분묘를 수축하라는 본도관문(本道關文)이 읍본(邑本)에 도착되어 있었다고 한다.

다시 빛난 두 충혼(忠魂)

임자(任子)(1792)년 정조는 다음과 같은 전교를 내렸는데 이는 오로지 쌍충의 위업을 숭보(崇報)하려는 전교였다. 제갈무후(諸葛武候)의 후예인 제말(諸沫)은 과거 성주목사였다. 곽재우와 동시에 조명(朝命)을 받고 토왜작전(討倭作戰)에 활약하였으나 아직까지 곽재우처럼 조가(朝家)의 숭보(崇報)를 받지 못함이 오직 유감이다. 고성과 진양등지에 끼친 그의 공로는 당시 감사(監司)였던 김성일의 견염에서도 볼 수 있다. 그후 성산대전은 이순신의 노량해전에 뒤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에 대하여 증직(贈職)이나 또는 증시(贈諡).도설수비(棹楔竪碑)등 아무런 보답이 없었다. 이 얼마나 모순이었는가. 
『이제 이 충신 제말에게 정경을 특증하고 홍문관으로 하여금, 미시를 내리는 한편 그 묘지에 치제(致祭)하도록 하라.』하고 그들이 공을 세운 곳에 정표의 비(碑)를 세워 대서특필로 다음과 같이 썼다.

『증병조판서제말선무공신증병조참판제홍록숙질쌍충지지』 
(贈兵曺判書諸沫宣武功臣贈兵曺參判諸弘祿叔姪雙忠之地)

그리고 문임으로 하여금 모든 전공사적을 기록하도록 했다. 이어 충장이란 시호가 내렸고, 『효충복의적의협력선무공신자헌대부병조판서겸지의금부사훈련원사통훈대부성주목사성주진병첨절제사독용수성장』(効忠伏義迪毅協力宣武功臣資憲大夫兵曺判書兼知義禁府事訓鍊院事通訓大夫星州牧使星州鎭兵僉節制使禿用守城將)에 증직 되었다. 
이때 정조의 어제제문(御製祭文)을 비롯하여 영남관찰사 정익하,태상정,정석유,통제사 이정회 등이 쓴 제문, 쌍충에 대한 찬송시가 보안문등이 있는데 이는 모두 그의 충철을 찬양한 것이다.

정조가 내린 어제제문(御製祭文)

지령으로 호걸이 나니 영남의 우도로다. 비호같이 날쌘 장군 와룡의 후예, 우리 의선이 끌고서 촉석을 분격했네. 강회(江淮)같이 끊어졌고 산악 같이 막았어라. 성야에 난 전투를 초유사는 알았도다. 임금이 책명주니 가장으로 시작 했네. 비부(蚍蜉)의 후원 끊켜 웅어(熊漁)의 의(義)를 세웠구나.
이충무와 곽장군은 초목(草木)도 알고 부유도 알건만 어떤 사람 그만 못해 공명(功名)이 불현했나. 한덩이 거친 무덤 때마다 재광있네. 성산관 죽림속에 신우설이 있었으니, 허황다고 하지마오 그럴 이치 있으리라. 장하도다 그의 조카 숙부보다 못지 않아. 6년의 병란 속에 서로 같이 순국했네.
죽어도 칼자루를 놓지 않네. 열열한 두 충신 천지와 같이 오래도록, 금년 7월 초가을에 북단에 숙배(肅拜)하며 나의 기탄 미루어서 경(卿)의 충단 기록노라. 회멸한건 자취였고 현양한건 충절일세. 회멸타가 현양함이 오늘날을 기다린 듯, 방백에게 순문하고 태사에게 명령하여 대서특필 쓰노니, 쌍충(雙忠)의 옛 터에....

 쌍충가(雙忠歌)        

                                  도우경(都宇暻) 지음

철성(鐵城)에 태어난 두 숙질(叔姪)의 남아(男兒), 당당한 그 충의(忠義) 본성(本性)을 타고 났네. 초야(草野)에 밭을 가는 청빈(淸貧)한 가세(家勢)였고, 술자리 슬픈 노래 강개(慷槪개)한 춤이었네. 궁마(弓馬)로 출세함이 본의(本意)는 아니었고, 원형(圓形)을 뜻에 두어 지방수령(地方守令) 지냈구나. 지나간 임진년(壬辰年)에 바다 물은 끓은듯, 왜적(倭賊)의 창과 칼이 천지(天地)를 흔들 때다. 농기(農器)로 창 만들고 종이로 기(旗)를 지어 광로(狂虜)를 섬멸하고 위국(爲國)하자 명세했네.
풍우(風雨)처럼 물아치고 번개 같이 빠르구나. 위험있는 그의 수염 호랑이도 도망 친다.
단창으로 대항하는 좌우충돌 난투전(難鬪戰), 전세는 산란하고 행오(行伍)도 일었도다.
큰 별이 홀연히 낙봉파(落鳳坡)에 떨어지니, 숭훈(崇勳)을 못 이루고 성은(聖恩)도 채 못갚아 공명(功名)이 민몰(泯沒)한지 백년이 지났네.
원한의 충혼이 얼마나 울었을까. 자고로 문인(文人)이란 감개(感慨)가 많아 달밝은 어느 밤에 객(客)과 서로 만났는가. 칼날에는 분명하게 피 흔적 남아있고, 현칠한 그의 기풍(氣風) 예와 다름 없네. 천추에 쌓인 한을 시(詩) 한 수로 어찌 전해, 횡설수설 많은 말로 회포를 풀었노라. 
다행하다 영남땅 야사의 붓이, 오늘날 성산부(星山府)에 자세히 전해질 줄. 장절(壯節)은 언제나 영멸(永滅)하지 않은 법. 후인(後人)의 약(弱)한 붓이 어떻게 형언 할까.
말속(末俗)을 권장하는 임금의 보충(藵忠)은, 이구(螭龜)의 대비(大碑) 세워 충정(忠精)을 표영(表影)하네.

제말(諸沫)에 대하여  

                                          이양경 지음

임진왜란 그 당시 누가 원훈인가.
지난 일은 강호에 수운만 갔네. 
창의할 때 남들은 삼장사라 칭 하였고, 
분충할 때 하늘은 한 장군을 빼냈구나.
사월에 우는 원학은 가엽기도 하고, 
적분을 소탕하는 웅파(熊罷)가 쉽지 않네.
장하도다 정석유(鄭錫儒)사필(史筆)을 잡아,
성산관 죽림(星山館 竹林)속에 귀음(鬼吟)을 들었다네.

제홍록(諸弘祿)에 대하여

                                          이양경 지음

조카의 충효(忠孝)도 군친(君親)을 같이 섬겨, 
임진왜란 일어날제 풍진을 밟아왔네.
하늘 두고 명세하며 청포(菁浦)를 건너가고, 
창을 들고 말을 달려 촉성을 수행하네.
그 당시 영남에는 생기(生氣)를 얻었건만,
불행이도 포위중에 그 몸을 다쳤구나.
면죽(綿竹)의 좋은 가성(家聲) 어느 시대 없을소냐. 
오늘날도 그의 충절 남도(南道)에 제일 일세.

찬양시(讚揚詩) 

                                이득양(李得養) 지음

한강(漢江)에 몇번이나 왜적이 건너 왔나. 
임진년 임금행차 북주(北州)로 직행 했네.
충익(忠翼)은 지휘하며 무술을 강마(講磨)하고, 
학봉(鶴峯)은 막부(幕府)에서 병법(兵法)을 토론하네.
때를 만난 의여(義旅)는 선창에 능하고, 
일이 가니 영웅은 자유롭지 못하구나.
남아(男兒)는 죽었는데 영혼(靈魂)은 죽지 않아, 
구름밖에 해,달, 같이 천추(千秋)에 밝아라.

찬양시(讚揚詩) 

                                 유태석(柳泰錫) 지음

한 가문에 태여난 두 숙질의 충신,
당당한 그의 충의 해 달 같이 밝아라. 
왜적 공로 세워 장부기재 붙들었고, 
나라위해 몸 바치며 위풍을 떨쳤구나.
이 나라에 제일일세 일문숙질 두 장군, 
견디기 어려워라 가슴속에 애국심정.
충의에 얽힌 혼백 영원토록 꺼짐없어, 
청사에 기리기리 방명을 전하누나.
일문숙질유쌍충 충의당당일월명 
(一門叔姪有雙忠 忠義堂堂日月明)

  찬 시(讚 詩)

斬級獻功扶壯氣 殉身報國動威風
참급헌공부장기 순신보국동위풍
我邦第一壯軍成 濟臆難堪愛國情
아방제일장군성 제억난감애국정
忠魂義魄庶無滅 靑史惟傳百世名
충혼의백서무멸 청사유전백세명
  
(참고 문헌)
학봉집(鶴峯集). 약천집(藥泉集). 청야만집. 조야회통. 박연암열. 하기(河記). 학산만록. 한국인명사전. 영남잡지.성주읍지.경산읍지. 건융지. 장절록. 호남절의록. 보성읍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