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양공 사적

충양공 사적

충양공 휘 제경욱 사적
순조 11년(1811) 신미(辛未年) 겨울에 토구(홍경래,난)서성으로 부터 가산(嘉山) 정주(定州)를 함락하니 가산군수(嘉山郡守) 정시(鄭蓍)가 정천 이북에서 전사하고 적(賊)에 추종하는 팔읍(八邑)이 소탕되니 증 삼도 통제사 제경욱(贈 三道統制使 諸景彧)이 전 우림장(前 羽林將)으로 벼슬을 내려놓고 고향에 내려와 있다가 홍경래난의 소식을 듣고 말하기를 우리 선조가 충신으로 순국(殉國)하였으니 후손으로써 능히 선조(先祖)를 본받지 않으면 어찌 선조님을 지하에서 다시 뵈며 하물며 우리 선왕(先王)의 지극한 은혜를 받을고 하고 그날당장 장검(仗劒)을 들고 서(西)를 향하여 임신원조(1812년 설날)에 평양부(平壤府)에 이르니 관찰사가 조정에 상문(上聞)하고 청북소모사(淸北召募使)로 명하니 公이 안주(安州)에가서 절도사(節度使)를 회견하고 적의동태를 토론함에 눈물이 사수(泗水)와 같으니 절도사가 성중의 병사 2백명을 나누어 주어 公이 밤을 기하여 청천강을 건너며 맹세하며 말하기 이와같은 강물과 같이 한번가면 다시 고향에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문구를 쓰고 그때 안주병사가 적(賊)에게 좌절되고 날센적이 정주성중(定州城中)에 침입하니 公이 모병(募兵)백여명으로 1월 4일에 성동진(城東陳)에 이르러 모든 장군(將軍)에게 지휘하였다. 적(賊)이 처음 입성하여 군심(軍心)이 미정하여 마땅이 급히 공격 하리라 하고 스스로 전봉(前鋒)이 되어 큰 도끼로 적의 성문(城門)을 부수니 적이 화살과 돌을 투하하고 교전이 치열한순간에 군졸이 계속하여 진격치 못하니 공히 탄식하고 말하길 병은 사지(死地)를 돌아보지 아니함에도 이에 적의 화살과 돌의 투석에 퇴전(退戰)함은 병법에 위반이라고 부하를 훈계하였다.

그후 조정에서 순무중군(巡撫中軍) 박기풍(朴基豊)을 보내 동시에 경영관서(京營關西)의 병사와 합세하여 크게 적성을 공격할 때 公이 또한 선봉으로 남문외(南門外)에 이르러 진지를 구축했으나 후군이 지원되지 못하고 우설(雨雪)이 심하여 군차(軍車)가 절단되니 公이 말하기를 오늘은 결사(決死)를 도모(圖謀)함에도 후군의 지원이 제대로 되지않는 것은 적의 공격에 여력이 없다하고 그후다시 군을 재정비 작전계획을 수립하여 드디어 적성(賊城)에 진입하여 적의 탄환에 公이 말에서 떨어져 숨을거두었으나  강렬한 눈빛과 불끈쥔 주먹으로 적을노려 보는것 같았다. 그 후 조정에서 벼슬을 증직하고 그 정려(旌閭)를 충신(忠臣)의 문(門)이라 칭(稱)하였다. 정주(定州)에서 절도영(節度營)까지 백이십여리 조정에 공의 영상(靈喪)이 도달하여 빈소를 맞이하고 그후  장일(葬日)에 군졸과 백성들의 애통(哀痛)이 극심하였다. 그떼 公과 동시에 순국(殉國)한 허항(許沆), 한호운(韓浩運), 배경한(白慶翰), 임지환(林之煥), 김대택(金大宅)등을 정주인이 오봉산(五峰山)하에 입사(立祠)하여 봉향(奉享)하였고 또한 가산인(嘉山人)이 정군수의 사우(祠宇)를 건립하여 봉향하고 칠의사(七義士)라고 칭하였다. 
우리동방을 예의지국이라고 칭 하고 승평(昇平)이 무사(無事)하며 이와같은 전변이 없고 충절을 논하는 자는 일조에 말할 수 없고 손을들고 보아도 국가를 위하여 촌척(寸尺)의 힘을 도우는자 별로 없으니 이 칠의사 같은자는 또 한 천하에 만치않으리라. 公은 팔백리의 원지에서 적과 같이 촌토(寸土)를 투쟁한 의분(義奮)이 하심(下心)에 격하여 칠척의 몸으로 필사무행(必死無幸)한 전쟁터를 밞아 조금도 후회하여 되돌아 오는 일이 없으니 장하다. 어찌 높고 높다 하지 않으리오.
公의 명은 경욱(景彧)이요, 字는 경식(敬植)이니 칠대조 성주목사(星州牧使) 휘 말(沫)이 임진난을 당하여 순국(殉國)하고 정조 16년 임자(1792년)에 특히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증직되고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고조 휘 명각(命珏)이요, 증조 휘 하열(夏悅)이며 조 휘 현태(顯泰)이며 통덕랑이다. 고 휘는 상부(祥富)이며 어머니는 평산신씨 동추대현(平山申氏 同樞大賢)의 따님이다. 

公은 정조대왕께서 충장공의 후예를 구하여 특히 급제(及第)를 하사하고 또 금단조의(錦緞朝衣) 일습(一襲)을 하사하여 정묘(正廟)가 은덕을 베품에 公이 감동을 금하지 못하였다. 公이 순국한지 겨우 한달여에 적이 모두 파멸되었으며 그 해 오월에 파주 명학산 정좌원(丁坐原)에 장사 지내고 다음해 계유년(1813년)에 단을 정주남쪽에 건립하여 적을격파한 날로서 公과 육의사를 제사지내며 돌을 채취하여 길옆에 수립(竪立)하고 그 충렬을 게양하고 또한 오봉사(五峰祠)라 현판하고 표절사(表節祠)라 칭하였다.

公이 영종경진중동회일(英宗庚辰仲冬晦日,1760년 11월30일)출생 하여향년 53세이였다. 배(配)는 광산김씨 통덕랑 후승(光山金氏 通德郞 厚昇)의 따님이며 정부인(貞夫人)을 증(贈)하였다.
장남에 안국(安國)이며 부장(部將)으로 군수를 역임하고 첨절제사(僉節制使)이다. 두 딸 사위에 이복원(李復源), 남효백(南孝百)이며 안국의 장남은 한위(漢緯)이고 무과급제 하고 차남은 한경(漢絅)이다. 딸의 사위에 최범구(崔範九)다. 公은 처음 무관으로서 선전관(宣傳官)을 겸하여 훈련원 주부, 판관첨정(判官僉正)에 승급하였다. 운총 만호(雲寵 萬戶)와 서해우후 절도사(西海虞侯 節度使)등이 그 공적과 노고를 상언하여 절충(折衝)에 진질(進秩)되어 오위장(五衛將)을 역임하고 우림장(羽林將)에 이르고, 신도 첨절제사(薪島 僉節制使)와 청북방어장(淸北防禦將)을 제수(除授)하니 이는 군중(軍中)의 약력(略歷)이다.
公이 삼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의 곡성(哭聲)을 듣고 반드시 함께 곡 하였으며 그 후 모상(母喪)을 당하여 매일 성묘하며 애통하고 비록 심한 풍우(風雨)라도 그치지 아니하였다. 그리고 관직에 처 함에 있어 또한 공적이 있어 분명한 충효대절(忠孝大節)이 있었다. 
公의 평생에 크게 드러남이 이와 같으니 그 외 다른것은 가히 알것이다. 석주(奭周)가 임신(1812년)에 公의 순국한 사실이 상세함을 알고 전년(前年) 가을에 봉사(奉使)로 정주를 가서 칠의사(七義士) 비(碑)를 지나다가 성(城)의 북루에 올라 사고전지(四顧戰地)에 슬퍼하며 그의 남긴자취를 생각함이 오래되었드니 그 후 안국(安國)이 公의 유당(幽堂)의 명(銘)을 의속(依屬)하니 감히 불문(不文)으로 사양치 못하고 명(銘)하노니 
충신(忠臣)의 가문에 그 효자(孝子)있으리라. 처음에 효(孝)를 알고 끝으로 충(忠)을 쓰니 충은 오직 무엇인고 선왕(先王)의 보답이라 충장(忠壯)을 계승하니 그 효(孝) 더욱 빛나도다. 암암한 정주성에 빗발같은 적의 화살이며 바람같은 총탄이라 삼군(三軍)이 위협하나 홀로 굳세도다. 일신(一身)은 죽었으나 씩씩하고 굳센기상과 진취성 있는 정신은 강하고 대단하도다. 난(亂)중에 적진을 소탕하며 상소(上訴)를 궐문(闕門)에 들였도다. 요요(妖腰)가 류류(纍纍)하고 벽력이 소간(宵看)이다. 公이 능히 보국(報國)하니 나라에 영광이다. 그 영화 길이 주어 후사(後嗣)에 동장 동장: 구리로 만든 기념장 같은 덕의 총칭 
(銅章)하니 근원(根源)의 유당(幽堂)에 비석(碑石)있어 재성(載聲)하니 公은 죽었으나 살아있는것과 같도다.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좌의정 겸 령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홍석주 지음(문간공, 호 연천)

표절사 봉안문

지난해 구월에 나쁜 무리(홍경래난)들이 침노하니 뭇백성이 파탕당하고 여러고을이 기와가 부서지는것 처럼 쪼개져 한탄스럽다.
오직 公은 충의(忠毅)의 예손(裔孫)으로 평소의 근원이 나라위해 순신(殉身)이라 개연(慨然)히 맹세하고 분기(奮起)하여 서하(西下)하며 동문(東門)을 선봉(先鋒)으로 큰 도끼로서 성문 빗장을 부수고 남성(南城)은 후에 공격하며 씩씩한 담력을 앞세웠다. 
병차(兵車)가 축이 부러지고 단창(單槍)이 끊어지며 우뢰같은 포화와 화살이 쏫아지는 빗속에서도 후퇴하지 않았으나 적의 탄환에 말에서 떨어져 쓰러저도 수염을 날리고 창을 어루만지니 오직 公과 같은 의열(義烈)은 죽어도 한껏높다. 의기(義氣)는 산하(山河)같고 정요 정요: 정성의 빛남.
(精耀)는 일성(日星)과 같도다. 운수(雲水)가 양양 양양: 큰바다.
(羊羊)하고 산천(山川)이 혁혁 (赫赫)하니 영령(英靈)이 계시는듯  뉘아니 경숙 (敬肅)할까 이에, 좋은날을 택하여 신위(神位)를 봉안(奉安)하니 두변
(豆籩)의 형결(馨潔)이 기리 백세(百世)로 보사 (報祀)하리라.